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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가난이란 무엇인가? 스크랩 1회
작성자 : 홈지기(in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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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일꾼
자발적 가난이란 무엇인가?가난한 예수님처럼, 우리도 가난해야 할 것인가-1                
                
                                         
                        
                                
  • 알로이시오 피어리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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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9.20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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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l Turret" by Dave Bowman

그리스도인이란 다음처럼 결심을 굳힌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 예수님을 따르고
- 그럼으로써 필연적으로 가난해지며, 또한
- 가난한 이들과 함께(가난한 이들 편에)하겠다는 결심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결심은 서로 깊게 연관되어 있다. 가난해짐으로써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가난한 이들 편에 얼마나 함께 하느냐에 따라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 결심들의 근거는 성경전체의 기본주제가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이라는 안목과, 이 기본주제로부터 파생되는 다음의 원칙들에 있다.

- 첫째는, 하느님과 재물이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대립관계에 있다는 원칙,
- 둘째는, 하느님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는 결코 취소할 수 없는 계약이 맺어 있는데,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계약이라는 원칙.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과 가난한 사람들은 공동의 적인 우상에 대하여 동맹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영성이란, 단순히 가난해지려고 노력할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과 함께 우상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다.

가난의 영성, 자발적 가난의 추구

하느님과 재물간의 결코 화해할 수 없는 대립, 이것이 성경의 가장 핵심 되는 주제이고, 이어 산상수훈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는 주제이다.

예수님의 지상 사명은 아버지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와 재물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 두 가지로 이루어진 삶이었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계약이었다. 재물과 영합하는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 하느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부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먼저 가난해져야 한다(마태 19,21).

예수님이 제시했던 구원, 하느님 나라는 부자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루카 6,20.24). 적어도 부자들이 재산을 포기하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기적적인 개입이 있어야 가능했다(마태 10,25-27).

 

                                                                       
Powerful photo of a priest holding a dying soldier while bullets are fired around them. Venezuela, 1962

그리스도교 전통에 나타난 가난의 의미:
행동적 가난과 영적 가난의 일치 

재물에 대한 포기, 즉 외적포기와 하느님께의 매달림, 즉 내적포기를 그리스도교에서는 전통적으로 통틀어 “가난”이란 말로 표현해 왔다. 이냐시오는 예수님의 전체 영성을 가난이란 한 단어로 요약하고 있다.

이냐시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는 재물의 포기를 “행동적 가난”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내적 의지의 포기를 “영적 가난”으로 서술한다. 정적인 덕이 아니라 역동적인 싸움이라 정의할 때, “가난” 만큼 “예수 사건”을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단어는 없다. 그리스도의 결단, 태도, 행동 모두가 이 가난으로 인하여 분명히 파악된다. 가난은 그분이 지상에서 행한 구원사명의 근저에 흐르고 있다. 이 가난을 알아듣는다면 우리도 그분을 아는 것이요, 그것을 실천한다면 그분을 따르는 것이다.

가난은 그렇다고 단순히 재물에 대한 포기, 물질적 차원의 포기만이 아니다. 우상은 재물 그 이상의 것이다. 우상은 내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음흉한 힘이요,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던(루카 12,13-21) 것과 같이 어리석은 부자가 되려는 탐욕적인 본능이다. 우상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요, 나에게 가해지는 어떤 것이다.

우상이 약속하고 가져오는 것은 안정, 성공, 권력, 특권이며,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 나를 특별한 인간으로 드러내려는 영적인 탐욕들이다. 우상은 내가 지도자로서 특별한 은총을 가진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존경에 대하여 뿌리칠 수 없는 은근한 자만심을 갖게 하고, 지도자나 도인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한다. 물론 하느님의 영광과 영혼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이 선택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하느님의 힘이 그분을 통하여 꿈틀거릴 때, 병자를 고치고 설교가 권위 있게 파문을 일으킬 때, 격앙된 군중이 그분의 주위에 몰려들 때 아버지에 대한 예수님의 신앙은 위기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 이스라엘의 스승이요, 군중의 지도자요, 하느님의 예언자, 그리고 혹시 알겠는가 그렇게도 기다려왔던 구세주가 아닐까?

하느님으로부터 왔음을 증명하는 표징을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들로부터 요구받았을 때 예수님은 그러한 제안을 일축하고, 이들을 가리켜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라고 하며 넌지시 요나의 이야기를 빗대어 그분의 권위는 오직 적들에 의해 완전히 굴욕당한 후 드러날 것이라고 말한다(마태 16,1-4). 이때는 예수님의 인기가 점점 떨어지고 따라서 외로움이 더욱 깊어가던 시기였다.

예수님은 이제 그분의 사명이 즉각 성공을 하리라고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우상이 지배하는 이 기존체제와 질서의 희생자로서 그분 자신이 죽지 않는 한, 결코 하느님의 새로운 질서가 열릴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공공연히 십자가에 대하여 말문을 열기 시작하였고, 십자가가 그분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걸어갈 모든 이들의 공동운명임을 말하였다. 새로운 인간은 권력과 특권이 아니라, 약함과 실패와 굴욕을 통하여 성취될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기대했던 바와 달리 지도자는 이제 야훼의 고통받는 종으로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에게 떠받들리는 것이 하느님께는 가증스럽게 보인다.” 그분은 재물을 사랑하고, 비웃었던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과 우상에 대하여 말했던 것을 상기시킨다(루카 16,13-15).

예수님의 이 새로운 안목과 선택은 생애 내내 반복되고 쇄신되어야 했다(마태 20,20-28; 마르 8,31-33; 루카 9,51-55; 요한 6,15; 18,36…). 특히 사명의 마지막 결정적 순간에(마르 14,32; 마태 26,52-53)

아버지 하느님께 온통 내맡겨야 했을 때 아마도 예수님은 메시아적 환상에서 벗어나려고 무척 애썼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즉 누가 예수님의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충실함을 알 수 있겠는가 이다. 그것은 다만 우상과의 끊임없는 갈등을 보고 짐작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의 가난은 진정 수많은 유혹 앞에서 하느님의 뜻만을 구하려는 끊임없는 분별과정을 통하여 이루어가는 은총과 지혜의 고통스러운 성장이다. 그것은 그분 자신의 신원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이요 위기의 순간들이며, 아버지 하느님께 변화무쌍한 싸움을 걸어오는 우상으로부터 발생되는 위기였다.

그러므로 가난은 하느님과 우상에 대한 예수님의 고유하고도 독특한 자세였다.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부활 후 성령강림에 이르러 비로소 이 가난을 이해할 수 있었다(사도 1,6). 오로지 하느님과 성령의 힘에 의하여 제자들이 스승의 정신을 나누어 가질 수 있었을 때, 예수님의 영성과 갈등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스승이 유혹을 받았다면, 제자인 교회도 끊임없이 유혹과 갈등을 느껴야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가난은 어차피 갈등의 영성이다. 우상이 있는 한 위기를 모면할 길은 없다. 그러나 이 위기와 유혹들은 “예수님께서 가난하셨으니 우리도 가난해지는” 새로운 길과 자극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Journal d’un curé de campagne / Diary of a Country Priest (1951) - dir. Robert Bresson

가난과 교회의 쇄신

교회는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면서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그때 일단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막으로 나가 그리스도의 정신을 되찾음으로써 승리주의에 젖은 교회에 도전하며,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자성과 위기의식을 제기하였다. 바실리오나 베네딕토 성인은 이 사막의 체험을 교회에 도입하였고 수도승들은 그리스도의 가난을 지키는 상징적 존재로 대두하였다.

또한 중세유럽사회가 상업경제와 산업혁명으로 말미암아 혼란과 격동기에 처했을 때 왈도파 수도승들은 프란치스코의 영향을 받아 “가난한 예수”를 제창하였다. 이 탁발승들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난을 본받아 자신의 신원을 회복하였고 사회에도 공헌할 수 있었다.

1536년에는 교회가 공식적으로 이 가난의 문제에 개입한 적도 있었다. 즉 교종 바오로 3세는 1536년 교회개혁위원회를 조직하였고, 당시 교회 혼란의 원인을 독신제가 아니라 성직자들의 재물오용, 친족기용, 성직매매 등 재물문제라고 진단하였다.

이냐시오가 교회에 공헌한 바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한 반동의 개혁이 아니라 기존교회에 대한 근본적이고 내적인 쇄신을 추진하였다는데 있다. 그는 교회가 예수님의 영성에 뿌리박기를, 즉 가난한 이들을 위한 행동적 가난이 안된다면 적어도 영적인 가난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복음에 의하면, 하느님의 반대세력은 성이나 결혼이 아니라 우상이다. 그러므로 독신이 아니라 바로 가난이 하느님에 대한 충실성을 결정짓는 근본요인이다. 독신도 성도 결국 우상에 의해 오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결혼의 포기가 가장 최고의 성덕임을 인정하는 인도에서도 독신자가 재물을 포기하지 않을 때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인정되지 못한다.

가장이었던 간디가 인도의 성자로 추대된 것은 부인과의 금욕생활이 아니라 그의 행동적인 가난과 포기 때문이었다. 정결이란 복음적 청빈으로 길들여지지 않으면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덕이다. 가난 없는 독신이란 자신의 안락과 편안함만 추구하는 극도의 이기적인 생활이다. 이는 성 암브로시오도 비난한 바 있다.

이냐시오는 결코 가짜 우상과 진짜 우상을 혼동하지 않았다. 그는 하느님의 가짜적, 예를 들어 세상, 물질, 결혼 혹은 여자등과 불필요한 싸움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두 화합할 수 없는 상대와 만난다고 생각했다. 하나는 재물로서, 하느님에 반대하여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자만심으로 하느님 나라를 파괴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가난으로 우상에 대항하여 겸손과 그 열매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다.

“큰 것은 미운 것이요, 작은 것은 아름답다”는 이냐시오의 논리는 사탄과 예수님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이냐시오가 살았던 시대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곧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상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냐시오가 우리에게 예수님의 영성을 가난으로 여기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전해준 것은 큰 공헌이었다. 이냐시오는 가난을 부와 가난 사이의 구체적인 선택으로, 갈등으로 이해하였고, 승리는 가난을 선택하는 이들에게 보장되어 있다고 알려준다. 또한 세상 속에서 악마의 세력을 날카롭게 분별하는 규칙을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규칙들은 거의 개인차원에만 적용되고 있다.

오늘날 하느님 나라를 방해하는 우상은 비단 개별적이고 심리적인 차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상은 하느님과 우리의 수직적 관계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수평적 관계도 위태롭게 하는 낭비와 결핍, 소외의 사회질서를 유발시키는 거대한 사회조직적 세력으로 드러나고 있다. 부유한 이들의 낭비를 줄이는 방법, 즉 가난해지는 방법과 가난한 이들의 결핍을 감소시키고 그들을 위한 새로운 분별력과 행동이 요구되는 것이다.

[출처] <누구와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 참사람되어,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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