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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의 교회, 제도를 넘어 복음실천으로 스크랩 1회
작성자 : 홈지기(in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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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의 교회, 제도를 넘어 복음실천으로

제자됨의 여정-6 /교회-4

새로운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 부활의 진리를 보존하는 창고가 아니다. 존재자체가 그리스도 부활의 역사적 사건의 구체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교회가 존재한다. 교회는 예수의 부활때문에 생겨 났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의 생성은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 그들에 대한 봉사라는 구체적인 삶과 본질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가난한 이들의 교회는 바로 교회 존재의 본질과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문제의식에서 시작된다. 신학적 근거는 아주 간단 명료하다. 진리, 즉 하느님의 영은 가난한 이들 안에 현존하시며,가난한 이들을 통해 교회를 늘 새롭게 창조하신다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 예수의 영은 가난한 이들 속에서 육화(肉化)한다.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을 통해 당신의 계획을 드러 내시고 역사의 향방을 보여 주신다.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 나라의 의의를 발견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이들의 관점에서 볼 때만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된다. 

가난한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이해해야 할 궁극적 진리와 실천 행위의 신학적 원천이다. 가난한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궁극적 삶의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마지막 해답이다.

가난한 이들의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기초 위에 세워지며, 가난한 이들 속에서 교회 자신의 구조, 조직, 사명의 원리를 발견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 구성의 한 부분이 아니라, 그 ”중심“이다. 이처럼 가난한 이들이 중심이 되는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와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가난한 이들의 교회는 기존의 교회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이다.

 

하나됨의 교회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된다는 것은 교회 전체가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로 움직이고, 그들의 무력함을 나누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유일성을 확보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은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서 온 인류가 하나가 되는 그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파견하신 것처럼 저 또한 그들을 세상에 파견하였습니다”(요한 17,18)

파견의 궁극적인 목적은 가난한 이들의 해방이다. 교회의 신원과 그 단일성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되는 역사 밑바닥 가난한 이들의 요구에 응답함으로써 획득된다. ‘하나인 교회’상은 가난한 이들의 교회안에서 현실화된다. 가난한 이들의 교회는 교회의 일치와 단일성의 원리가 구현될 수 있는 구체적인 통로이며 방식이다. 보다 나은 세상, 가난한 이들이 들어 높여지는 새로운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의지와 이에 응답해야하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식별하는데는 서로 이견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앙이란 “ 다른 이들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과정으로 이해할 때 교회의 단일성이 획득된다. 신앙안의 일치는 교계제도의 피라믿 꼭지점과 같은 것이 아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고, 가난한 이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믿음과 소리를 높일 수 있게 되는,즉 그들이 바로 교회의 중심이 되는 그 때가 진정한 일치이다(가난한 이들이 교회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배타적, 계급적 의미에서의 교회 권력의 중심 이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한 이들의 교회는 주교 직분이 교회의 지도자로서 교회의 단일성과 일치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요청한다. 그러나 주교의 직분은 그가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때만 비로서 그 가치가 발휘된다.

주교는 교회 권위의 상징이 아니며, 일치의 표징일 뿐이다. 주교의 진정한 권위는 하느님 나라의 작은 모델인 ‘가난한 이들의 교회’안에서 더욱 철저한 가난과 무력함의 상징으로 남을 때 비로서 드러나게 된다.

가난한 이들은 궁극적으로 교회가 하나됨을 향한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가난한 이들은 교회로 하여금 지금 교계제도안에서 보여지는 외견상의 일치가 목적이 아니며, 진정한 일치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수행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거룩한 교회

교회는 구원의 표지이다. 교회는 하느님 사랑의 역사적 매개체인 성사(聖事)로 존재한다. 교회의 거룩함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받아 들이고,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한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키고자 할 때 획득된다.

교회와 그 성원들의 성화(聖化)의 표지는 곧 십자가의 고통과 수난의 표지이다. 불의에 대한 저항 때문에 받는 박해의 표지이며, 그리스도교인들의 희망의 초석인 복음적 가난의 표지이다. 따라서 교회의 거룩함은 ‘가난의 거룩함’이어야 한다.

교회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첫째 요소는 재창조라는 사명이며, 정의 실현과 완전한 해방이다. 가난한 이들의 교회는 ‘거룩함’을 야훼의 종, 예수의 ‘케노시스’, 자기 비움안에서 발견한다. 가난한 이들을 선택한다는 것은 야훼의 종에게서 고유하게 드러나는 그 거룩함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난한 이들의 교회를 통해서 드러나는 거룩함은 야훼의 종의 거룩함이다. 그는 민족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정의를 추구함으로써 세상의 죄를 물리치고 정의를 바로 세우신다. 야훼의 종이 그러하셨듯이 교회가 그 길을 뒤따를 때 거룩한 교회가 된다. 이러한 거룩함이 결여되어 있는 교회는 진정한 교회가 아니다. 교회는 ‘거룩한’만큼 ‘참’교회가 된다.

요컨데, ‘거룩한 교회’는 역사를 통해 예수의 삶의 방식을 본받아 충실하게 뒤따르는 교회. 거룩한 교회는 예수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교회이다. 그 길은 가난한 이들과는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뿌리깊은 형제애로 결속된 고난의 길이며, 동시에 권력과의 투쟁의 길이다.

‘가난한 이들의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불의와 권력에 의해 억압받고 죽을 때 함께 억압받고 함께 죽는다. 우리가 바라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교회상은 이러한 ‘거룩한’ 교회의 모습이며, 예수의 원형을 보다 가깝게 닮은 가난한 이들의 교회이다.

 

증거와 파견의 교회 

사도성이란 예수로부터 그의 증거자로 파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는 사도적 증거와 예수의 일을 끊임없이 수행하도록 불림을 받았다는 그 기초 위에 생겨 났다. 이러한 사도성은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서 어느 시대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함. 교회는 파견된 자로서 세상과 인류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할 사명을 지닌다.

교회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곧 사도적 사명을 갖는다는 것이다. 이 파견적 사명은 교회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가 알아듣고 깨달아야만 하는 “파견 그 자체”로부터 오는 것이다. 교회는 사도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늘 파견된 자로서 존재해야하고, 제도로서의 교회 자체보다도 사도직 수행이 우선되어야만 한다.

교회 사명의 첫번째 요소는 복음선포, 즉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대다수의 억눌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현존하는 한, 하느님의 나라 선포는 여전히 계속되어야 한다.

이 시대에 현존하는 가난한 이들은 교회가 여전히 복음 선포 사명에 충실하게 서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교회를 자극하고 이끌어 가는 동력) 따라서 교회의 사도적 증거와 파견은 교회 전체가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될 때 비로소 시작된다. 교회가 예수처럼 가난한 이들을 끌어 안을 때, 비로서 교회는 사도성을 이어 받는 것.

가난한 사람들 스스로가 복음 메시지의 전달자가 되고, 복음화의 능동적 주체가 될 때,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를 ‘가난한 이들의 교회’로 바꾸어 놓을 때, 교회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정통성을 획득하게 된다. 교회가 사도적 파견이라는 자기 사명의 실현을 통해 끊임없이 ‘가난한 이들의 교회’로 변화되는 만큼,바로 그만큼 교회는 참 교회가 된다.

가난한 이들의 교회, 그 영성적 기초

가난한 이들의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정의하고 이해했던 ‘하느님 백성인 교회’라는 개념을 넘어 선다. 가난한 이들의 교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관심을 표명하는 교회상을 넘어 선다. 

가난한 이들의 교회는 가난한 이들로부터 교회의 사회적, 역사적 기초를 발견하는 교회이다. 인류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 빈곤의 자연적 조건때문만이 아니라 타인들에 의해 강요된 역사적 조건에 의해 개별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그 존재의 근거와 기초로 삼는 교회이다.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지닌 영적 기초는 자발적인 가난의 선택과 가난한 이들과의 효과적인 연대, 그리고 이러한 연대때문에 당연히 받게 되는 수난과 박해를 받아 들임에 있다.(그리스도적인 가난의 영성) 이러한 정신화는 가난하게 되고자하는 원의(願意)가 아니라, 교회가 실제로 현실적인 가난을 철저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하다. 

가난과 무력함 그리고 세상권력과 맘몬의 세력으로부터 박해를 받는 것은 교회가 하느님의 뜻에 충실히 올바로 따라갈 수 있기 위해 현실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이다. 이때 교회는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성서(마태 11,5; 루가 7,22)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가난한 일들에게 일어 난 일들을 증언한다. 성서에서 소경, 절름발이, 귀머거리들은 언제나 죽음의 사람들을 상징한다.

가난한 이들의 교회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며, 기쁜 소식이 가난한 이들에게 선포되고 있다는 사실로써 우리 곁에 가까이 계신 하느님의 체험을 구체화한다.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창조주이신 하느님, 생명의 하느님에 관한 진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하느님이 하느님답게, 참 하느님으로서 체험되는 것은 가난한 이들을 통해서, 가난한 이들의 교회를 통해서 가능하다. 가난한 이들의 교회에 있어서 하느님의 신비를 체험하는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는 이웃사랑이다. 사랑의 실천은 하느님의 신비를 막바로 체험할 수 있는 첩경이다. “하느님께서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1).

가난한 이들의 교회에서 사랑의 실천은 나와 너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이웃이 되어주는 것뿐 아니라, 빈곤과 억압의 상황에 처한 소외 계층의 민중들에게 이웃이 되어주는 행위를 의미한다.

 

예수를 따르는 교회 

교회는 실존했던 역사의 예수를 따라야 한다. 교회는 다양한 형태로 하느님과 예수의 일에 참여한다. 교회는 전례나 교의를 통해 또 조직과 제도를 통해 자신의 활동을 구현한다. 그러나 교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진리가 이 세상에 구체적인 현실로서 성취될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투신하였다. 예수는 자신이 처했던 구체적인 역사 상황 속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현실화하려고 애썼다. 예수는 불의한 사회 구조 속을 뚫고 들어가 하느님의 나라를 이룩하려 했다. 역사 예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교회의 자기 이해를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된다. 

교회는 자신의 존재 근거를 단지 조직이나 제도에서가 아니라, 바로 역사 예수의 삶에서 찾아야 한다. 교회는 더이상 교회 자신을 선포해서는 안된다, 예수가 자기 자신을 선포하지 않은 것처럼. 교회가 자신을 선포하고, 자신의 제도를 공고히하고, 또 교회 자체를 가장 중요하고 일차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노력들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예수의 삶과는 근본적으로 어긋난다. 

오늘날 교회에 던져져야 할 핵심적인 물음은 교회는 단지 말로써 그리스도를 선포하고자만 하는가? 아니면 예수가 행한 것을 또한 교회도 행하려고 하는가? 하는 것이다. 

복음화 사명을 실천하는 교회

교회가 복음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물음은 결국 교회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물음과 상통한다. 현대교회의 복음화는 오늘날 교회가 안고 있는 심각하고 중대한 위기를 세가지 관점에서 언급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단지 새로운 방식의 복음화가 요청되는 차원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교회의 존재 방식이 요구된다. 복음화의 문제는 결국 교회존재와 본질에 관한 중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바로 이해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복음화의 길을 모색할 수 없다. 교회는 자신의 정체성을 복음화의 사명으로부터 이끌어 낸다. 복음화를 위한 교회 활동의 궁극적 지평은 하느님 나라이다.

교회의 본질에 관해서 명백히 대비되는 두가지 모델. 1)법적, 제도적 교회 모델과 2)역사적 교회모델이 있다. 첫째 모델은 예수가 지상생활을 하는 동안 “교회”라고 불리는 제도를 설립했으며, 교회의 위계적, 교의적, 성사적 구조들을 예수가 직접 교회에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 교회 모델에서는 교회의 본질을 이루는 근간은 제도로서 그 사명보다 우위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는 신약성서의 진리와는 근본적으로 배치된다. 이러한 제도적, 법적교회 모델은 오늘날 새롭게 제기되고 있는 역사적 교회에 의해 도전받고 있다.

역사적 교회 모델은 역사적 실재로서의 그리스도의 삶과 부활이 교회를 생겨나게 했으며, 역사적 예수의 삶과 부활이 본래의 성서적 의미에서 ”교회”라고 일컫는 새로운 존재 형태의 규범이 되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예수는 자신의 공생활 첫단계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했다. 예수가 선포한 것은 하느님 나라였다. 그는 교회를 선포한 적이 없었으며, 교회 제도를 수립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처음부터 자신의 사명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을 원했다(12제자-선포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의 충만성을 상징) 

12제자의 선택과 부르심의 의미는 예수가 선포하고 행한 것을 따라 선포하고 행하도록 파견되었다는 것이다. 12제자의 존재의 근거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하느님 나라가 도래했음을 드러내 보여주는 징표로서 그 존재의미가 있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은 궁극적으로 사명실천에로 이끈다. 성서에서 그리스도 신앙에 이른 사람들은 단순한 “목격자”가 아니라 “증거자”들이다. 교회는 목격자들이 증거자들로 변하기 시작했을 때, 즉 그들이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진 사명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즉 교회는 예수의 사명을 이어받아 이를 세상 가운데서 수행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역사의 예수는 살아 생전에 사명 실천을 위해서 제자들을 불러 모았다. 부활 후에는 증거적 삶과 사명실천을 위해 제자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였다. 그러므로 중요한 결론은 교회의 존재성은 제도나 구조로서 규정지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취해야 할 사명으로부터 획득된다는 것이다.

교회는 역사를 통해 자신의 제도나 조직을 견지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성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복음화를 향한 자신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만 자신의 존재성을 지킬 수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수행해 나가야 할 고유한 그리스도적 사명은 교회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끊임없이 올바로 이해해야만하는 바로 그 사명이 참 교회를 창조해 나가는 것이다.

해방하는 교회

바오로 6세 현대의 복음화:

“인류를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 무엇보다도 죄로부터의 해방이야말로 하느님의 가장 위대한 선물이다”.

“교회는 수많은 사람들의 해방을 선포해야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교회는 사람들이 이러한 해방으로 새로이 태어남을 위해 협력해야할 의무가 있으며, 그 해방을 증거하고, 그 해방의 실현을 확신하고 보증해야 할 의무가 있다”

현대의 복음화는 복음화의 기본 원리를 예수에게서 찾고 있다. 복음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희망적인 기쁜소식이다. 예수의 복음화는 말씀선포와 여러 표징적 행위, 즉 역사적 실천 행위를 통해 이루어졌다. 복음화는 말씀의 선포, 증거적 삶과 아울러 예언적 고발을 포함한다. 복음선포와 증거와 고발은 동일한 하나의 실재를 위해 행해져야만 한다. 그 하나의 실재= 하느님 나라.

이 하느님 나라는 ‘교회’가 아니다. 비밀스런 천상 왕국도 아니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영적인 실재가 아니라, 이 역사 안에 구체적으로 실현될 구원의 나라이다. 복음화란 하느님 나라라는 총체적인 비전 안에서 세상의 변화를 꾀하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화란 결국 인간 해방을 포함한 총체적인 세상의 구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은 정치적 해방, 경제적 해방, 인종해방, 여성해방, 개인의 해방 등, 모든 억압적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을 포함한다.

 “교회의 의무는 인류의 해방을 말로써 선포할 뿐 아니라, 구체적으로 인류해방의 역사적 과정에 참여하고 협력하는데 있다.”

이와같은 의미의 복음화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교회가 무엇인가?”라는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과 이에 따른 철저한 회개가 요청된다. 자신의 제도나 구조, 복음화의 방법들을 끊임없이 새롭게 변화시켜 나가야한다. 교회는 의식적(儀式的)이고 제도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사명과 역할을 이해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증거적이고 예언적인 차원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복음화가 올바로 수행되기 위해서는 교회제도나 조직이 아니라, 하느님 영(靈)에 의존하는 자유로움과 창조성, 그리고 하느님 말씀의 해방적 힘에 대한 우선적 믿음이 요청된다.

[출처] <참사람되어> 199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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