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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쉬운 복음 아니라 분명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스크랩 1회
작성자 : 홈지기(in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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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쉬운 복음 아니라 분명한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제자됨의 여정-4 /교회-2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우며 

세상을 위하여 회개한 사람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예수님의 이 선포는 교회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사는 방식을 보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왔다는 것이 별로 증명되지 않는다.

교회가 말하는 것을 살지 못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는데서 오는 소치. 즉 그리스도인은 누구이며, 누구에게 속해있는가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기반은 이미 예수가 아니고 복음적 가치도 아니다. 결국 가짜신의 예배로 전락되어 있다. 

교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들, 예를 들어 복음선교, 정의봉사, 성령운동 등등. 그러나 우리시대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단순히 교회가 되라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교회는 교회가 되라는! 즉 서로 사랑하고 세상을 위하여 우리 생명을 바치는 것이다. 살아있고 숨을 쉬며 사랑하는 신앙의 공동체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결 단: 예수의 사명은 회개와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회개란 새로운 질서로 들어 가기 위한 관문으로 한 개인의 삶, 전체의 양식과 특징, 방향등이 완전히 거꾸로 변혁되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에 대하여 무엇을 믿느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예수가 우리에게 물으시는 결단이다. 복음선포자들의 과제는 복음을 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분명하게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가족: 새로운 질서는 나눔의 생활이라는 맥락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진다. 교회 그 자체가 기쁜 소식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 공동체에 대한 가장 단순한 정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똑같은 생명을 서로 나누고 세상에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적은 박해가 아니라 유혹이다. 우리는 박해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주님됨과 화해될 수 없는 사고방식, 생활방식의 유혹을 받는 사람들 일 뿐이다. 만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공동체보다 이 세상의 원칙과 권력에 그들 생존의 뿌리를 두고 있다면 분명히 교회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회심이란 이 세계로부터 또 다른 세계로, 한 공동체에서 다른 공동체로 사람들이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체는 우리 자신의 삶이 치유되고 또한 그 치유가 국가치유의 근간이 되는 자리이다.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궁극적으로 체제에 저항하고 보다 나은 인간적 생활방식에 영적인 적절한 기반을 준비하는 것이다.

오순절의 경제: 사도행전 2장 4장: 새로운 경제 창조 = 경제문제에 관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려했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이 드러난다. 그래서 성령의 오심은 새로운 경제-새로운 가족-새로운 공동생활를 추구한다. 

돈은 단순히 물질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이다. 성서는 돈과 소유물의 축적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방해하는 커다란 영적 위험이라 보았다. 하느님인가 황금인가하는 것은 영적인 선택이다.

오늘날 교회는 동시에 두가지를 섬기려 한다. 부의 맹목적인 소유는 돈을 섬긴다는 증거. 성서는 이것을 ‘노예 상태’로 동일시한다. 또한 성서는 부의 축적을 불의라고 본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정의는 재물의 축적 때문에 희생된다.

교회가 된다는 것의 부분적 의미는 우리가 지닌 자원을 이웃과 함께 경제적으로 나누고 조절하는 것. 경제적 나눔은 전체교회의 모습을 특징지어 주어야 하며 성직자, 수도회나 특별한 봉사 그룹뿐 아니라 모든 하느님 백성이 살아가야하는 길이다.

교회가 쇄신될 것인가 말 것인가는 돈과 재물에 관한 우리의 자세 변화에 달려 있다.

지금 교회의 모습은 비전을 잃어버린 사람들과 같다. 교회는 자신의 삶에 대한 비전을 잃어 버렸다. 그러므로 교회를 다시 세우는 일은 예배나 복음선교, 사목적 배려 혹은 급진적인 정치참여 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예언자들처럼 하느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이 누구이며 누구에게 속해있는가를 철저히 깨닫도록 요구해야 한다.

교회를 다시 세운다는 것은 교회의 치유와 정체성을 회복할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교회의 사회사목적 사명 

아시아에서 한편으로 비인간화 시키는 가난, 불의, 억압 등의 현상을 보며 또 한편으로 종교의 다원성과 민중들의 종교적 사명을 본다. 교회의 사회사목적 사명은 이러한 아시아 현실의 맥락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는데 있다. 역사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구현은 산상수훈에 나타난 가치관을 육화시키는데 있다.

아시아 오세아니아 지역교회의 사회사목적 사명은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는데 있어서 다른 종교들과 함께하는 다양한 신앙인들간의 상호활동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명을 뒷받침 해주어야 하는 교회론은 신앙공동체로서의 교회이다.

먼저 양떼가 있고, 그리고 그 양떼를 위하여 목자가 있는 교회이다. 하느님의 백성이 우선적이고 그 백성의 조직은 두 번째이며 조직은 하느님 백성을 섬기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교회의 정체성과 판단기준: 교회는 하느님 나라와 세상을 위하여 존재한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기 위한 수단이다. 하느님 나라가 교회의 목적이며 합법화의 근거이고 판단 기준이 된다.

하느님 나라의 가치관들은 아시아 오세아니아의 종교적 체험과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그리스도인들의 독점물일 수 없다. 다른 종교들은 하느님 나라의 가치관을 증진하는 방향에 서 있음으로 그들과의 협력은 의무적인 것이다.

교회의 사명은 정치적 야망을 지니지 않으며 어떤 이념이나 정치제도를 선택하지 않는다. 교회의 사명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견지해야 한다. 교회의 사명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행동을 인식하고 해방을 향한 가난한 이들의 여정을 돕는 것이다.

 

교회 스스로 해방돼야 한다 

1970년대부터 여느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나는 사회불의와 억눌린 이들의 외침을 생명의 하느님과 관련지어 복음을 설명하고자 애써왔다. 이렇게 생겨난 것이 해방신학이다. 해방신학을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해방력을 되찾고 예수에 대한 위험한 기억을 오늘에 되살리려 했다. 그럼으로써 권력자들이 이익에 묶어두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쇠사슬을 깨뜨리고 싶었다.

나는 지나치게 중앙집권화한 신성권력을 성직자들의 손에 쥐어놓는 그런 모든 구조와 행동방식을 교회자신의 삶에서 극복할 때 비로서 교회가 억눌린 이들의 해방과 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존하는 교회조직 형태는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형제자매 되어 사는 예수와 사도들의 이상향을 실현하고 촉진하기보다는 도리어 차등을 조장하며 반영하고 있다.

오늘날 로마가톨릭 교회 안에는 두가지 대립적 갈등의 깊은 위기가 있다. 첫째, 교회에 분명한 질서가 필요하며 따라서 모든이의 순종과 복종에 온 무게를 실어야한다는 주장. 이런 태도는 교회 안에서 중앙행정을 맡아 결정을 내리는 지위에 있는 대다수가 취하고 있는 자세이다. 둘째, 교회가 끊임없이 스스로 해방될 필요가 있다는 데서 출발하여, 역사를 꿰뚫어 활동하는 성령을 믿고 생명력을 믿는 자세.이런 자세는 제3세계와 브라질의 변두리 교회가 지니고 있는 자세이다.

나는 둘째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다.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겨내고 있는 ‘무방비 상태의 꽃들’과 눈에 띄지 않게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들에 희망을 걸고 있는 그런 이의 하나이다.

도시에서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교회의 모습 

그리스도신앙에 근거한 철저함은 머릿 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누는 삶으로부터 형성된다. 

예언적 사명과 사목적 사명과의 관계는 우리 시대의 기본적이며 신학적인 질문, 즉 교회의 형태에 관한 문제로 초점이 모아진다. 가난하고 착취당한 사람들과의 일치, 주권과 권력의 폭력에 대한 저항, 전 지구 차원의 정의와 평화 만들기, 성서를 따르는 백성으로서 새로운 삶의 방식 형성하기, 세상의 고통과 부서짐 한 가운데서 육화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교회형태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초대되고 향해야 할 교회 모습과 현재 우리 교회의 형태와는 아주 대조적이다. 현재 우리 교회모습은 주변문화에 지나치게 순응적이고, 삶의 방향과 조정에 있어서 기존 사회체제에 종속적이다. 우리 교회의 형태와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비판적인 비전이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할 것.

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의 차이

유럽의 그리스도교는 2천년, 라틴아메리카는 겨우 500년도 채 못된다. 더구나 라틴아메리카의 교회는 엄미히 말해 메델린 이후로 시작되었기에 15살도 안됨. 

유럽의 교회는 긴 역사, 전통들로 가득찬 교회. 그러나 전통이란 모호한 것이어서 어떤 것들은 제도에 밀착된 외형적인 증가에 불과해 발전의 장애물이 되어버린 전통도 있다.

사회적인 차이: 유럽교회는 이미 발전된 사회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으나 라틴 교회는 저개발, 주변부의 세계에 있다. 유럽에서는 중간계층이 전 인구의 반,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중간계층이 20%에 불과하다.

종교적 차이: 유럽의 세속화 과정은 교회의 지배로부터 사회의 자율권이 급속도로 가속화 되었다. 따라서 유럽에서 교회는 교회이고 정치와 경제는 정치와 경제일뿐이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 사회는 지배적으로 종교적인 사회이다.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인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며, 착취를 당하고 있으며 동시에 종교적인 사람들이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 때문에라도 상호협력의 기초가 존재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사목 방식을 그대로 유럽에 이식할 수 없지만, 라틴아메리카 교회는 유럽교회에 도전이 될 것이다.

 

희망의 징표들

* 복음의 재발견

유럽에서 발견되는 희망적인 첫번째 경향은 복음 말씀을 읽고 나누는 이래 관심이 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유럽교회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 왜냐하면 복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이 집착하게되는 모든 인위적인 전통으로부터 교회를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유럽교회의 복음화는 교리교육의 배가, 신학의 재정립, 사목교서를 늘이는 것으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중간 매개체를 넘어서 신앙의 핵심과 본질에 다다를때에만 가능하다. 현대문화에 의해 겹겹이 싸여있는 모든 허식, 겉치레, 복음을 질식시키고 있는 겉치레들 뒤에 있는 복음의 본질을 재발견하는 일이다.

복음은 가난한 이들의 눈으로 아이들의 마음으로, 즉 단순하게 믿을 때에만 참 복음이 될 수 있다.

* 공동체와 그룹들

- 유럽교회의 희망적 징표 두 번째=여러 분야에서 일어나고 있는 공동체와 그룹들이다. 단순히 조직상의 재구성으로는 교회쇄신이 불가능하다. 작은 공동체에 의해 구성된 기초들로부터 교회조직의 변화가 가능하다. 공동체 안에서의 참여는 교회를 새롭게 만들며 변화시킬 것이다. 참여에 의해 평신도들은 교회의 주도자가 되며, 이런 참여가 없다면 교회는 교의적인 형식주의나 허구로 전락할 것이다

교회를 두 개의 분리된 교회로 만들고 성직자와 평신도를 마치 고용주와 피고용인처럼, 생산자와 고객으로, 주인과 하인으로서 적대적인 계급관계로 만드는 성직주의는 대중의 참여로서만 고쳐질 수 있다.

* 제도를 극복하기

올바른 목적은 제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 참다운 사명에 도달하는 것이며 억압받는 이들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도와 맺는 관계는 교류와 동시에 쇄신의 관계이다.

* 가난한 사람들

유럽교회에서 발견되는 세 번째 경향은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이다. 억압받는 사람들 편에 서지 않는다면 교회에는 미래가 없다. 복음화의 법칙은 육화의 법칙이다. 육화없이 구원은 없다. 그러므로 유럽교회가 미래로 옮겨갈려면 교계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가야 한다. 교회가 견고하게 가난한 이들 편에 설 때에 그것은 신앙을 약화시키기보다 교회에 대한 신뢰를 더해 준다.

유럽교회가 중산층 사이에 자리잡고 있고 (총 인구의 반) 2~3%의 상류 부르주아와 약간의 노동자 계층이 교회 구성원이기 때문에 중산층교회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운동은 피라미드의 제일 밑을 향해 하강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더 낮은 계층에 우선적으로 다가가기 위하여, 아직도 총 인구의 반을 구성하고 있는 밑바닥 계층에 이르기 위해 특권계층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이것이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혹은 ‘기초로부터 다시 시작하기’가 의미하는 실천이다.

사람들에게 뻗어나가는 움직임들, 유럽교회에 대한 기대

제3세계와의 연대가 싹터 가고 있다. 제3세계는 제 1세계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그들로부터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 역으로 제1세계는 자신을 이해하는데 있어 가난한 국가들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면 참다운 자기신원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다.

제1세계와 제3세계 교회간의 나눔과 통교가 절실히 요청된다. 그 나눔은 신학적인 사상뿐 아니라 사목체험과 인력의 나눔이어야 한다.

백성이 바라는 교회

교회는 역시 항상 교회이지만 그 존재방식은 변한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다. 교회는 사제들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사제는 중요하지만 사제 자신이 교회가 아니며 교회를 창조하지 못한다. 그리스도가 집주인이시다. 우리는 저마다 그 건물을 쌓고 있는 벽돌들이다.

백성의 교회: 교회는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그 사람들이란 돈 많고 직위가 높은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가난하셨고 사도들도 가난했다. 그러므로 교회 역시 가난해야 한다. 예수께서 가난한 이들을 우선시하셨듯이 교회도 가난한 이들을 우선시해야 한다.

작은 교회: 많은 군중보다는 그룹들이나 작은 공동체들이 귀중하다. 자신들이 곧 교회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작은 공동체의 복음적 실천이 중요하다.

공동체적 교회: 군중이 아닌 삶과 관심사가 공유되고 나눔이 있는 기초공동체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 이 말의 뜻은 아주 간단하고 명백하다. 즉 그리스도를 주축으로 삼는 교회이다.

평신도의 교회: 평신도는 곧 교회이다. 따라서 그들은 교회의 일차적 주체이다.

인격화된 교회: 미사와 세례성사, 혼배, 장례식을 사기 위해 익명의 사람들이 모이는 신앙의 시장이 아닌 인격의 교류가 있는 교회

카리스마적 교회: 규칙과 기구들과 자동적인 예식들로 가득찬 교회가 아닌 성령의 생명력으로 가득찬 교회

다수의 교회: 다수의 교회란 주위의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는 교회이다.

가난한 교회: 가난한 이들의 교회가 아니라 그 자체가 가난한 교회라는 뜻이다. 사치하거나 화려하지 않고, 장식되거나 화장되지 않는 교회. 진리나 구원에 있어 독선적인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교회.

순례하는 교회: 순례하는 교회는 움직일 수 있는 발이 있고 끊임없이 미래를 향해 출발하는 교회이다. 이 교회는 부단히 자체의 생활양식을 교정하고 끊임없이 쇄신과정을 밟는 교회이다.

초교파적 교회: 타교회와 일치를 추구하는 교회. 일치를 원하시는 하느님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교회: 인간발전을 위한 현실적 세상의 관심사를 함께 고민하고 나누는 공동체

역동적인 교회: 자기자신에게만 골몰하거나 자기 구조 속에 폐쇄되어 있지 않은 교회. 인간 삶의 모든 사건들을 성사화하는 교회.

종이 되는 교회: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존재이유는 봉사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봉사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듯이.

누룩이 되는 교회: 세상과 따로 동떨어져 있는 교회는 반죽과 따로 있는 누룩 같다. 교회는 새 세상의 누룩이요, 반죽을 부풀게 하는 효소와 같다. 새 세상은 도래하게 될 하느님 나라이다.

예언하는 교회: 불의를 고발하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참 뜻을 보여주는 교회.

해방하는 교회: 해방은 구원을 의미한다.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 보다 우애있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려고 노력하는 교회.

[출처] <참사람되어> 199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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