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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러 세상에 온 예수는 '교리'에 관심 없다 스크랩 1회
작성자 : 홈지기(in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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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러 세상에 온 예수는 '교리'에 관심 없다

제자됨의 여정-2 /예수-2

1. 사람이 되신 하느님

- “머문다는 것”, 어느 특별한 장소의 하느님 현존은 곧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특별한 관계 양식을 암시한다. 하지만, 야훼 하느님은 인간들이 세운 성전 안에 갇혀 머물러 계시지만은 않는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성전이 하느님을 가두어 놓을 수는 없다. 성전 그 자체는 빈 공간일 뿐이다. 하느님의 현존은 돌이나 금은으로 치장한 성전과 동일시될 수 없다.(예레 3,16; 이사 66,1-2).

하느님이 더 좋아하고 어여삐 살피는 것은 훌륭하게 치장된 성전이나 희생제물이 아니라, 사람의 속 깊은 마음이다.(에제 36,26-27). 하느님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현존하실 것이다.

하느님 현존의 약속은 당신 외아들의 육화사건으로 결정적으로 성취된다. 하느님은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 자신을 인간의 눈에 보이도록 드러내 보이셨다. 하느님의 아들, 그에게는 성전이 필요치 않았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성전이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살아있는 돌의 성전이며, 이 공동체의 한 사람 한 사람은 “성령이 머무시는 성전”이다.(1고린 3,16-17; 6,19).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보내진 성령과 그의 아들은 세상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모든 사람들 안에 머무신다. 그리스도인들만이 하느님의 성전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 모두가 살아있는 하느님의 성전이다. “정녕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서 거처하셨다”(요한 1,14).

하느님이 살을 취하셨다. 하느님은 숨쉬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구체적으로 현존하신다. 더 이상 하느님은 장막이나 높은 곳, 성전에 머무는 영적인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은 육신이요, 인간 역사와 함께 하시는 역사적 존재요, 가시적 존재이다.

살을 취하신 하느님은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의 정의와 평화를 세우시기 위해 더 깊이 인간 역사 안에서 활동하신다. 하느님의 이러한 현존 양식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지를 규정한다. 

이웃을 경시하고, 비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거스리는 것이다. (신명 24,14-15; 출애 22,21-23; 잠언 17,5). 야훼를 아는 것,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가난한 이들과 억눌린 이들에게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예레 22,13-16). 가난한 자들에게 구체적인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이사 1,10-17; 58,6-7).

사람들 안에 머무시는 하느님의 현존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웃 안에서 절정을 이룬다. "진실히 너희에게 이르거니와, 너희가 이 지극히 작은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에게 해주었을 때마다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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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빠, 하느님의 아들

아빠! 예수는 하느님에 대해 아주 단순하고 친밀감을 가지고 말했다.(갈라 4,6) 예수는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느님을 대하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은 어떤 분이며, 그의 속성들은 무엇이며 등등의 교리를 가르친 적이 없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요한 14,8-10).

예수의 메시지는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알고자 할 때에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확신시켜 준다. 하느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를 아는 데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러했듯이 예수의 길을 따라 참 인간이 되고, 참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법을 배우고 받아 들인다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로 이를 수 있는 확실하고 참된 길이다.

예수가 행한 일들은 그 자신의 일이 아니었다. 그 일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일이었으며, 그분의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행해진 일들이었다. 예수에게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명을 부여 받고, 이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삶 전체를 바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복음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 관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교리를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의 삶에 동참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참다운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는 삶의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보여 주었다. 주여, 주여, 하면서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쫒아 사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마태 7,21). 이처럼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참다운 순종은 온 힘을 다해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완수하고자 하는 삶을 끊임없이 창조해 나가는데 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본뜨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를 통해 계시된 것이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바로 이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 그것이 완전함에 이르는 길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참 아들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생애 전체가 바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예표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수와 하느님 사이에 오고간 대화가 무엇인지 예수를 통해 들은 적이 없다. 복음서가 전하고 있는 것은 예수 혼자만의 독백일 뿐이다. 하느님은 아무런 응답이 없다. 우리는 하느님과 예수 사이에서 ‘당신과 나’와 같은 식의 뚜렷한 인격적 교감을 찾아 볼 수 없다. 예수와 하느님 사이의 실질적인 대화는 오직 구체적으로 인간을 위해 바쳐지는 전폭적인 봉사와 섬김의 삶 그것이었다.

3. 예수를 안다는 것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요한 3,3)

예수는 사람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또는 새로이 태어난 사람으로 규정지을만한 어떤 특별한 자격 요건이나 기준도 제시하지 않았다. 예수는 이를 위한 어떠한 의식(儀式)이나 전례도, 관습도 특별히 만들지 않았다. 그에게는 성전(聖殿)조차도 필요치 않았다. “당신들은 위로부터 새로 나야 한다고 내가 당신들에게 말했다고해서 놀라지 마시오. 바람은 불고 싶은대로 붑니다. 영으로부터 난 이는 모두 이와 같습니다”(요한 3,7-8).

우리를 새로운 삶에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요한복음에서 믿음과 생명-삶은 언제나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생명에로 일깨워지는 것”, 그것이 믿음이다. 표징이나 기적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은 아니다. 예수에 대한 신앙은 단순히 그에게 의존하여 손모아 비는 행위와는 다르다.

신앙은 또한 쉽게 달아 오르는 격정같은 것이 아니다. 또 신앙은 철학이 아니다. 신앙은 과학이 아니며, 도덕적 관념과 같은 것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신앙이란 앎이다. 예수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다.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품안에 계시는 외아들, 하느님이신 그분이 알려 주셨다.”(1,18)

예수를 안다는 것은 예수가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현존이며, 아버지로부터 파견된 분이며, 예수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전 존재가 드러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진리를 아는 것이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진리 안에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말한 영원한 삶은 진리를 안다는 것이며, 안다는 것은 진리 안에 사는 것이다. 예수의 파견과 진리 사이에는 이중의 연결고리가 있다. 그의 파견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진리를 알리는 일이었고, 파견 그 자체가 바로 진리였다.

예수의 파견에 참여한다는 것은 곧 거짓말을 버리고 진리 안에로 들어 간다는 것이다. 예수의 파견에 참여한다는 것은 교회라는 울타리 속으로, 제도 속으로 사람들을 끌어 모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아는 믿음, 즉 진리의 삶에로 사람들을 초대하는데 있다.

"나는 여러분에게 새로운 계명을 줍니다. 서로 사랑하시오. 내가 여러분을 사랑한 것 처럼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시오. 여러분이 서로 사랑을 나누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여러분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한 13,34-35)

예수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랑의 움직임, 그 과정을 아는 것이다. 예수가 바로 그 과정의 핵심이며,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4.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사람들을 뜻하며, 유대인들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상징적으로 대표한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경건하고 믿음이 두터운 사람들이라고 자처했다.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선민적 우월의식은 자기기만이라는 껍질 속에 진짜 불신의 요소를 감추고 있었다. 우리들 모두 다를 바 없다.

“빛이 어둠 속에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빛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요한1,5)

세상은 자신들을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 들이지 못함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예수가 직면한 사람들의 몰이해는 당대의 종교들이 얼마나 거짓과 오류에 물들어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 오늘날 그리스도교 역시 자칫하면 하느님께로 나가는 길을 가로 막는 자기방어적 매카니즘에 빠져버리기 쉽다. 예수께 대한 맹목적인 경신의식은 오히려 참된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을 가로막을 수 있다.

예수의 적대자들은 천하고, 부도덕하고, 못난 이들이 아니었다. 예수의 적은 잘배우고, 돈많고, 떵떵거리고 사는 권력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예수는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다는 것은 결국 먼저 자신들의 심적, 사회적 안정을 뒷받침해주고 있는 기존의 사회, 종교적 체제를 뿌리부터 부수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하느님과 세상의 대립은 결국 인간의 개인적, 집단적 이기주의와의 대립으로 요약된다.

5. 예수의 자유

예수는 자유롭게 사셨다. 예수는 어떠한 조직이나 당에 속하지 않았다. 예수는 당시의 유대인들과 달리 회당의 종교적 관습에서도 자유로웠다. 그는 땅을 소유하지도 않았고, 부자들이나 권력자들에게 아무 도움도 청하지 않았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사람은 모두가 자유로운 존재. 하느님은 인간을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했다. 다만 이 자유로운 인간들을 바리사이나 율법학자, 정치가, 사제들이 굴레를 씌우고 사기치며 노예상태로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는 자유로운 사람들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면 그들은 이미 자유롭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예수가 할 일은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는 거짓된 힘을 파괴하는 것, 하느님의 백성들을 노예로만들고 있는 억압의 힘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 이것이 예수 투쟁의 요체였다.

예수의 메시지는 자신들을 휘어잡고 있는 사회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도전이었다. 예수의 자유로움. 종교적, 사회적, 정치적, 관습과 법으로부터의 그의 자유로움은 곧 죽음의 사자였다. 그의 죽음은 거짓과 위선, 권력과의 비타협의 결과였다.

예수는 자유를 선포했다. 그는 스스로 죄로부터 자유로웠기에 자유를 선포할 수 있었고, 그가 죄로부터 자유로웠던 까닭은 이스라엘의 소위 경건한 종교인들이 보존해온 율법이나 종교적 조직때문이 아니었다. 그가 받은 성령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교회의 제도나 법이나 규칙대신에 성령의 작용을 믿고 기대는 일! 바로 이 중요한 사실이 오늘날까지 교회를 향해 던져지고 있는 끊임없는 도전이며 예수의 질문이다.

 

영화 [광야의 40일] 스틸컷
영화 [광야의 40일] 스틸컷

6. 예수의 고독,뒤따름 

예수는 자신을 향한 어떠한 숭배의 말이나 경신행위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제자들은 예수를 예언자로서 혹은 메시아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으로 떠받든 것은 아니었다. 예수가 신으로 경배된 것은 훨씬 후대의 일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말한다. 예수가 원한 것은 단순한 종교적 경신행위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예수의 길을 따르고, 하느님 나라를 위한 예수의 사명을 이어받아 계속 수행하며,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다.(마태10,39) 

예수의 제자됨은 예수를 신으로 받들기 위한 제사를 주관하는 사제가 됨에 있지 않다. 예수의 제자됨은 사람들의 영혼을 사고 파는 회사의 일꾼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됨은 예수의 길을 뒤따름에 있다.

예수는 늘 고독했다.(마르 1,35; 마르14,32-43) 그러나 그 고독은 수도승의 그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늘 군중 한가운데 있었다. 그는 늘 사람들과 만났다. 한사람 한사람과 구체적으로 그들 자신의 문제에 마주치면서. 그러면 교회는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교회는 사람들의 문제를 어떻게 마주치고 있는가?

7. 예수의 평화

예수의 평화는 구약성서의 샬롬과 같다. 샬롬이란 함께 있는 모든 이들의 안녕을 뜻한다. 샬롬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연대성을 드러내는 징표이며, 서로 더불어 함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구약성서에서 샬롬은 항상 정의와 연관되어 있다. 평화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실재의 현실이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르다. 하느님의 평화는 참 평화를 가로막는 모든 장애물, 즉 사회의 구조적인 악과 불의,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편견과 죄와 거슬러 투쟁하라는 하느님의 호출장이다.

불의가 이 사회를 지배하는 한, 어떤 교회도 어떤 그리스도인도 평화를 운운할 수 없다. 우리는 세상이 말하는 평화가 아니라, 하느님의 평화를 원한다. 모든 인간이 하나되고, 분열과 적의의 벽이 허물어지는 평화의 길은 철저한 선택과 결단의, 십자가의 길이다.

8. 기쁜소식(복음) 

예수는 우리를 해방시키려 오셨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본래의 모습대로 되어지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려 오셨다. 

-예수는 우리를 자유롭게 되도록 하시려 오셨다. 우리 스스로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임을 스스로 깨닫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 오셨다.

예수는 우리 모든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 안에 하느님의 빛과 하느님의 기운이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생명이 어떻게 살아 숨쉬고 있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오셨다.

 

사진출처=pixabay.com

 

9. 예수의 일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이나 종교에 관한 말이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파견된 예수의 <일>을 통해서 표현되고 전달되는, 인간을 향해 열려진 하느님의 마음과 사랑이다. 하느님의 <일>은 곧 말씀이며, 말씀은 곧 예수의 <일>이다. 

“내 음식은,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의 일을 다 이루는 것입니다”(요한 4,34)
“아직까지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며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요한5,17)

예수가 행한 <일>의 목적은 생명을 주는 것, 곧 사람들을 일으키고 살리는데 있다. 일한다는 것은 빛을 비추는 것이며, 보지 못하는 사람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예수의 <일>은 또한 그로부터 파견된 제자들에게 주어진 일이기도 하다. (요한 14,12) 

예수의 일은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어떻게 계속되어 왔는가? 역사를 거듭하면서 교회는 예수의 일을 제도 속에 가둬버렸다. 예수는 제자들이 사람낚는 어부가 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 관리자가 되고 말았다.

예수의 <일>은 부활의 행위이며, 사람들을 약함과 악으로부터 힘과 선에로 해방시키는 생명의 행위들이다. (사도 10,38)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 안에서 “육신이 되셨고”, 하느님 아들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는 성서의 증언은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세상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일>, <예수의 일>에 동참하도록 초대하고 있다.

10. 예수의 하느님

예수는 종교적 경신행위를 하지 않았다. 예수는 종교적 의식으로부터 해방되어 있었고, 그의 제자들도 그렇게 되기를 바랬다. 또한 예수는 자신이 사람들로부터 경배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예수는 자신을 숭배하는 어떤 의식도 제정하지 않았다. 예수가 행한 만찬은 공동체 성원간의 결속의 상징이었으며, 새로운 이스라엘 건설을 위한 새로운 계약의 체결과 상징적 연관이 있다. 예수가 행한 성찬례는 엄밀한 의미에서 경신행위가 아니었다.

예수는 기도했다. 그러나 특별한 의식을 갖추지 않고 기도했다. 예수에게 기도는 언제나 은밀한 것이었다. 그에게 기도는 예배의식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밀한 대화였다.

예수는 하느님을 종종 “아빠”라고 불렀다. 예수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전례적이거나 제사적인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이 예수에게 바라시는 유일한 제사는 그가 아버지로부터 받은 특별한 사명의 실천이었다. 복음선포를 위해 끊임없이 여행하면서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고, 군중과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실천,완수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께 순종했다. 그러나 하느님께 대한 그의 순종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바침으로써가 아니라, 갈릴리의 길가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기적을 행하고, 아버지를 증거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교회는 누구인가?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제도가 아니다. 교회의 정체성과 정당성은 그가 받은 사명의 실천에 있다. 하느님께 대한 참된 봉사는 교회를 확장시키고 공고히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아버지의 뜻과 사랑을 실천하는데 있다.

11. 생명이신 예수

예수는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파견되었다. 그 영광은 곧 사람들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요한 20,31) 산다는 것은 인간 본성인 선을 위해 스스로가 지닌 충만한 가능성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은 곧 인간생명, 삶의 충만함에 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요약이며 핵심이다.

예수는 생명을 가르쳤다. 그 생명은 이웃사랑과 진리에로 다가가는 길을 막고 있는 모든 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새로운 생명에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믿음은 새로운 삶의 질을 규정한다. 믿음의 행위는 끊임없는 변화의 상태에 놓여 있으며, 삶의 모든 다양한 사건과 상황 속에서 작용하는 새로운 존재방식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일”이다. “믿음”을 일깨우는 일이다. 교회 현실은 어떠한가? 생명을 주어야 할 <믿음>은 공적인 <신앙형식>(신조)로 바뀌었고, <믿는 이들의 공동체>이어야 할 교회는 <교회 다니는 이들의 집합체>로 바뀌었다. 신조가 믿음을 대신하고, 정해진 규격의 기도가 찬양을 대신하고 있지는 않는가?

12.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예수의 사람되심은 ‘하느님의 일’의 절정이며, 그분의 영광은 거기서 드러났다. 그러나 예수의 영광은 명성이나 명예로움이나, 위풍당당함이 아니었다. 그의 영광은 오직 비천한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 천대받고 억눌린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만이 알아채고 누릴 수 있는 십자가의 영광이다.

제자들이 누려야 할 영광 역시 스승의 그것과 같을 것이었다. 가난과 고난과 십자가의 영광. 하지만 역사 속에서 오늘날까지 누려온 교회의 영광은 예수의 그것인가? 교회의 영광을 알아채고 함께 누린 이들은 어떤 이들이었는가?

13. 예수의 죽음

죽음을 통해서 예수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냈다.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요한12,28)

“십자가의 길”은 곧 하느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었다. 예수에게 있어서 죽음은 세례이며, 정화이며, 새로운 삶에로 넘어감이고, 새로운 변화를 의미한다. 예수의 삶과 죽음은 우리들에게 율법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사랑에 순종하는 것을 본보기로 보여 주었다.

예수의 죽음은 하느님으로 부터 파견된 예수의 일, 하느님의 일의 절정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예수의 말, 제자들에게 남긴 그의 유언은 예수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한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이 어떠해야하는 것을 요약한다. “주요 또 선생인 내가 여러분의 발을 씻었다면 여러분도 마땅히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준 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행한대로 여러분도 그렇게 행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3,14-16)

 

영화 [광야의 40일] 스틸컷
영화 [광야의 40일] 스틸컷

14. 반석인가 걸림돌인가? 

예수는 악마의 유혹을 받았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아래로 몸을 던지시오”(마태4,6; 4,8-9). 

율사들과 바리사이들도 예수를 시험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시험하여(peirazein:유혹하여) 하늘에서 내리는 표징을 자기들에게 보여 달라고 청하였다”(마태16,1). 제자들조차도 그를 시험하였다. 특히 베드로의 유혹은 아주 인간적인 것이었다. 십자가 아래 모여 있던 백성들도 예수를 시험하였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네 자신이나 구하려무나, 십자가에서 내려오려무나”(마태 27,40).

복음서는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고 전한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그를 어여삐 여겼노라”(마태 3,17).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믿어 주는 자, 마음에 들어 뽑아 세운 나의 종이다”(이사 42,1).
“너는 내 아들, 나 오늘 너를 낳았노라”(시편 2,7).

예수가 겪어야했던 악마의 유혹은 바로 자신을 야훼의 종-메시아로 선택한 하느님께 대한 믿음의 시험이었다. 이 유혹은 40일 광야에서의 유혹으로 끝날 것이 아니었다. 이 유혹은 십자가에 달려 죽는 그 날까지 그의 곁에 아주 가까이 있었다.(히브 4,15). 그가 걸어야 할 메시아의 길은 권세와 영광의 길이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어야했다. 야훼의 종은 군림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고난받는 메시아여야했다.

예수는 생애 동안 권력의 유혹과 끊임없이 마주쳐야 했다.(루가 4,6). 그러나 이런 유혹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언제나 “아니오” 였다. 예수는 오로지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자신의 사명을 죽기까지 다하였다. 

15. 그리스도를 닮은 교회

예수는 광야에서 40일을 머물렀고, 이스라엘 백성은 40년을 광야에서 머물러야 했다. 광야에서의 악마의 유혹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으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바로 교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예수가 권력의 유혹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했으니, 교회 역시 권력의 유혹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해야만 한다. 예수가 야훼의 종이였듯이 교회도 역시 하느님의 종이어야만 한다. 예수가 그러했듯이 교회 역시 죽기까지 철두철미하게 하느님께 순종할 각오가 되어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교회 현실을 둘러보면, 교회는 하느님의 일을 제쳐 놓은채 하느님의 나라가 아닌 자신들의 “작은 왕국”을 세우기 위해 분주한 것 같이 보인다. 베드로는 예수를 따르도록 초대되었다. 그러나 그의 불신은 그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베드로가 예수를 따르는데 방해가 되었던 걸림돌은 무엇이었는가? 베드로가 “반석”이라 불리웠던 까닭은 수난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의 길을 가고 있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처럼 종으로서의 교회가 되어 그의 길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야훼의 종, 메시아의 길을 뒤따르지 않고 세상의 권력과 손잡고 권력행사에 맛들인다면, 그때 교회는 사람들에게 “걸림돌”(스캔들)이 되고 말 것이다.

교회가 사람들-특히 작은 사람들-보다는 교회의 권위나 제도들을 우선적으로 옹호해야 할 최상의 가치로 여긴다면, 그때 역시 교회는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되고 말 것이다. (마태 20,25-28).

 

[출처] <참사람되어> 199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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